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섯 국면으로 구분된다.
제1국면은 5월 18일 학생시위에 의한 항쟁의 발단기이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사전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집결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강력한 저지로 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열이 점차 불어나자 계엄군이 다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은 첫날의 시위를 해산시켰으나 오히려
시민·학생들의 분노를 야기시켜 시위를 항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2국면은 학생시위에 시민이 합세하면서 봉기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19일부터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학생·시민들이 군경(軍警)과
공방전을 벌이면서부터 시위는 점차 격화되어갔다.
이 시기에 계엄군은 간선도로·주요시설 등을 확보하여
시위대를 포위하면서 대치했고, 이에 따라 시민들은 화염병·돌 등으로
초보적인 수준의 자위적 무장을 시작했다.
제3국면은 도시빈민·노동자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투쟁의 선두로 나선 20일부터 시작되어 무장항쟁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신문사·방송국·세무서·파출소 등 공공기관이 습격받았다.
특히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탈취한 소총 등의
무장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시점에서 시위대 대표와 도지사(道知事) 사이에 협상이 열렸으나
결렬되었고, 계속되는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급증했다.
제4국면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시가전에 돌입하고
항쟁이 전라남도권으로 확산되면서 농민들의 참여가 시작된
21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항쟁지도부를 구성한 시위대는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목포·영암·장성·나주 등으로 진출했으며, 22일 오전의 총공세로
도청과 도경에서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시내를 장악했다.
제5국면은 22일부터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다시 점령되는
27일까지의 시기이다.
광주를 장악한 시위대는 치안확보 등 자치활동을 수행했으며,
23일부터 매일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투쟁목표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때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가 광주시민의 요구를
수렴하기보다는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함으로써
수습대책위원회와 광주시민 사이에 분열이 야기되었다.
이에 시민들은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대책위원회를 규탄하고
25일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동시에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비해 시민군을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그러나 27일 새벽 0시를 기해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10일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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